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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시대’가 만든 새로운 욕망[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모두가 타이핑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잉크와 종이가 주는 감각적 경험, 손글씨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제 영어 필기체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미국 청소년은 드물어졌다. 중국도 '제필망자’(提筆忘字·펜을 들었는데 글자가 생각나지 않는다)란 말이 보편화됐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저서 '경험의 멸종'에서 이러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손글씨는 인쇄된 글자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사람의 경험을 대신해주는 시대다. 우리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유튜브로 세계를 누비고, 요리를 하지 않아도 레시피 영상으로 요리사가 된 기분을 느낀다. 콘서트에 가지 않아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메신저로 대화한다. 간접 경험이 실제 경험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 로젠이 말한 '경험의 멸종'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직접 경험에 대한 갈증이 새로운 욕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제품과 브랜드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술자리마저 심심해진 시대의 역설친구들과 술자리에 모였지만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풍경.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됐다. 하이네켄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보링모드’(Boring Mode) 캠페인에서 하이네켄은 특별한 스마트폰 케이스 ‘플립퍼’(Flipper)를 개발했다. '건배'라는 말이 나오면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뒤집어지는 장치다. 강제로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만들어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진짜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친구들과 ‘치어스’를 외치며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진짜 관계를 만드는 소중한 시간임을.21세기 최고의 록밴드로 불리는 콜드플레이의 공연에서도 직접 경험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스마트폰을 끄도록 요청하고, 대신 LED(발광 다이오드) 자이로밴드 팔찌를 나눠줬다. 노래에 맞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의 조명이 팔찌에서 빛을 발했다. 관객들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공연을 보는 대신, 자신이 직접, 공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했다. 수만명의 관객이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돼 빛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영상으로 남기기 위한 관람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진짜 경험이었다.요즘 도심 곳곳에서 팝업스토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공간이 아니다. 향기를 맡고 질감을 느끼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직접 만들어보는 복합 체험 공간이다. 온라인 쇼핑이 편리함의 극치를 달리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프라인 공간을 찾는다. 왜일까.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없는 감각적 경험, 그 '진짜' 느낌을 원하기 때문이다.런닝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게임 속 아바타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두 발로 땅을 밟고 달리는 것. 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고,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그 생생한 감각. 디지털을 통한 간접 체험의 대명사인 온라인 게임 열풍에 대한 반작용이 런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내 마라톤 대회 참가 인원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러닝 크루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마스터카드가 있다.” 20년 이상 이어진 이 슬로건만큼 마스터카드를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MO(최고 마케팅 책임자)’로 알려진 마스터 카드의 라자만나르는 “소비자는 더 이상 브랜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죠. 그래서 우리는 스토리텔링에서 스토리메이킹으로 전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브랜드 혼자 떠들지 말고, 소비자가 브랜드 스토리를 직접 경험하게 하라는 것이다.그는 기존의 유명한 ‘프라이스리스’(Priceless) 캠페인을 경험 플랫폼으로 발전시켰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 '값을 매길 수 없는 놀라움' '값을 매길 수 없는 대의명분' '값을 매길 수 없는 특별함'이라는 네 가지 경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는 그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코코 샤넬의 파리 탐험'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샤넬 부티크와 창시자 코코 샤넬이 살았던 동네를 둘러보는 투어다. 오직 마스터카드 소지자만 예약할 수 있다. 폐장 후의 루브르 박물관 투어, 미쉐린 셰프의 프라이빗 디너 같은 콘텐츠도 독점 제공한다.이런 경험 속에서 고객들은 자신이 브랜드의 일부가 되어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브랜드 경험을 하는 것이다.조 러브스(Jo Loves)는 붓으로 바르는 향수로 유명하다. 18ml 용량의 얇고 긴 병을 손에 쥐고 아래쪽을 펌핑하면, 반대편 끝에 달린 검은색 붓에 젤 형태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수채화를 그리듯 팔목과 귀밑에 쓱쓱 바르면 된다. 요가 매트 같은 곳에도 발라 향을 남길 수 있다.조 러브스는 영국의 향수 디자이너 조 말론이 만든 두 번째 브랜드다. 그는 이미 '조 말론 런던'이라는 거대한 성공을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2013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처음 2~3년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 러브스를 조 말론의 아류라고 생각했다. 말론은 전략을 바꿨다. 조 말론 런던의 주요 고객이 30대 여성이었다면, 조 러브스는 Z세대를 공략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제품과 흥미로운 고객 경험을 기획했다.그리고 런던 매장에 '향기 타파스 바’를 만들었다. 타파스는 스페인음식으로 작은 접시에 담긴 맛보기 음식이란 의미인데, 향기를 경험하게 하는 바인 셈이다. 매장 안 작은 바 자리에서 고객은 3단계 향기 타파스를 체험한다. 타파스지만 먹는 게 아니다. 모두 향을 맡는 것이다. 원하는 향을 고르면, 먼저 타진(향수를 따뜻한 증기로 시향하는 특별한 시향 프로그램)으로 증기를 내 향을 맡게 해준다. 그 다음엔 칵테일 셰이커에 향을 넣고 흔들어 '향 거품'을 낸다. 이 거품은 마티니 잔에 담아 고객이 향을 맡도록 한다. 붓으로 거품을 찍어 고객의 손에 발라주기도 한다.타파스 바를 경험한 고객의 제품 구매율은 거의 100%라고 한다. 고객들은 "생애 처음 접하는 브랜드 경험", "후각을 최대로 느낄 수 있는 환상적 경험"이라고 리뷰를 남겼다.‘경험의 멸종시대’ 브랜드 전략이러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몸을 움직이거나, 손을 쓰고, 맛을 보거나, 향기를 맡는 것처럼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오히려 '불편한' 직접 경험이 새로운 가치가 됐다.손글씨가 그러했듯, 우리는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실이 새로운 갈망을 만들어낸다. 화면 너머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는 욕망. 기록하기보다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기업과 브랜드에게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져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발로 땅을 밟는 감각,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경험, 직접 맡는 향기, 눈을 마주치며 나누는 대화. 이러한 원초적 경험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이 앞으로의 시장을 이끌어갈 것이다. '경험의 멸종' 시대, 역설적이게도 진짜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희소성이야말로 새로운 시장을 여는 열쇠다.

2025.10.18 07:00

5분 소요
청년 일자리 정책의 실종, 노동약자의 비애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대기업 공채는 이제 역사 속 단어로 바뀌었다. 기업 저마다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는 이야기만이 넘쳐난다. 여기에 AI는 일자리를 줄이는 역량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 고용 정책보다 노동 정책이 시대의 담론이다. 노란봉투법이나 4.5일제 근무제도니 하며 노동 기득권에 대한 논의만 무성하다. 그 어디에도 청년 세대는 정치와 정책에서 관심이 사라진 듯하다. 내 일자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결국 청년 일자리 정책이 실종됐다. 기득권 노조와 경직된 노동시장은 청년과 비정규직 같은 노동 약자의 기회를 빼앗고 기업의 신성장 동력마저 가로막고 있다. 좋은 일자리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닫힌 노동시장과 희망을 잃은 청년뿐이다. 청년 없는 일자리 정책, 그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애다.일자리 담론이 사라진다한때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상황판을 통해 일자리 지표를 점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공 일자리, 청년 고용 의무제, 스타트업 지원 등 성과와 한계를 떠나 청년 일자리는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성장과 복지, 제도 개혁 같은 거대 담론은 여전히 강조되지만 정작 청년이 체감할 수 있는 일자리 대책은 공백 상태다.고용노동부를 단순히 ‘노동부’로 바꾸려는 논의가 상징적이다. 이는 고용 정책을 사실상 축소하고 노동조건 관리에 치중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부가 일자리 문제를 민간에 떠넘기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단순한 민간 의존형 정책으로 풀 수 없으며 국가의 전략적 개입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구조적 과제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대기업 노조, 기득권의 벽청년 일자리가 줄어드는 또 다른 이유는 노동시장의 기득권 구조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높은 임금과 고용 안정을 누리지만, 그 결과 청년의 진입 기회는 좁아졌다. 신규 채용은 줄고, 기존 조합원의 기득권은 강화되는 ‘닫힌 노동시장’이 형성된 것이다.결국 청년들은 스펙을 쌓아도 대기업 문턱을 넘지 못하고,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가 기업의 혁신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신산업 전환과 구조 재편에 필요한 인력 조정이 불가능해지면서 기업은 신성장 동력을 국내에서 찾기보다 해외로 옮긴다. 청년 일자리가 국내에서 줄어드는 악순환이다. 여기에 정규직 중심의 과보호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심화시키고, 청년과 비정규직이 ‘을 중의 을’로 남게 만드는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고착화시킨다.좋은 일자리 해외로 빠져나가삼성, SK, LG, 현대차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다.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결정적 요인이라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노사 갈등 리스크가 깔려 있다. 미국은 비교적 유연한 노동시장과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제공한다. 반면 한국은 고용 유연성이 낮고, 노조 갈등이 잦다.그 결과, 좋은 일자리가 한국을 떠나고 있다. 고임금·숙련 직무가 미국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청년은 글로벌 기업의 본국 청년보다 불리한 출발선에 서게 된다. 더구나 생산라인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협력업체·부품사·기술 엔지니어까지 연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고용 생태계 자체가 위축된다. 장기적으로는 산업경쟁력의 기반을 잃고, 청년의 기회는 더욱 협소해지는 구조적 위기로 이어진다.정부의 편향된 시각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의 시각이다. 특정 정권은 ‘노동자 보호’를 명분으로 기득권 노조를 사실상 방치하고 다른 정권은 기업 편향으로 흘러 노동권을 위협한다. 어느 쪽이든 균형을 잃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청년의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귀결된다.정부의 책무는 분명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청년 고용 여력을 넓히되 동시에 청년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을 보장하는 것이다. 세제와 인프라, 인재 양성은 기본이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고 기득권 구조를 완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 대책이 원점에서 흔들리면, 기업도 청년도 미래를 신뢰할 수 없다. 예측 가능성과 지속성이야말로 청년 일자리 정책의 기본 토대다.노동시장 청년이 중심이 되어야앞으로의 노동정책은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기회 확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청년과 비정규직 대표가 노사 협의체에 참여하도록 제도화하고 신규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동시에 해고와 전환배치를 합리화하되, 재취업과 직업훈련을 강화하는 ‘플렉시큐리티’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특히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은 더 유연하게 투자하고, 노조는 청년 고용 확대에 협력하며, 정부는 청년의 사회안전망을 보강해야 한다. 청년이 중심이 되는 노동시장을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생존의 전제 조건이다.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일 할 곳을 못 찾는 40만 명의 청년 일자리 문제이다. 하물며 생산 가능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결국 이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과제만이 국가의 미래와 활력을 약속한다. 다시 국정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저출산·고령화, 성장 둔화라는 거대한 파고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특히 오늘의 노동 환경은 기득권을 가진 대기업 노조와 정규직 중심 구조가 장벽을 세운 반면, 청년과 비정규직, 여성, 고령층 등 노동 약자는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청년은 ‘미래의 노동력’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노동 약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없는 일자리 정책은 공허하다. 청년과 노동 약자를 위한 정책 없이는 국가의 미래도 없다. 기득권의 벽을 허물고 청년에게 기회를 돌려주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다.

2025.10.12 08:00

4분 소요
이래서는 ‘기록의 민족’도, ‘IT 강국’도 없다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우리는 세계가 인정한 ‘기록의 민족’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팔만대장경’(2007년)과 ‘조선왕조실록’(1997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는데요, 불경을 새긴 목판 8만1258판(280톤)이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한 데는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는데요, 목판을 바닷물에 1~2년 담가 뒀다가 소금물에 삶고 건조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옻칠로 방충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보관 장소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햇빛·바람·습기 등이 목판 보존에 최적의 환경이 되도록 설계했는데 지금의 과학자들도 놀라워합니다. 해인사가 가야산의 깊은 산속에 있어 임진왜란·한국전쟁 등 숱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팔만대장경을 지금도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우리 민족의 기록과 보존의 세계적인 역량을 보여줍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 정치·경제·외교·군사·법률·산업·예술·종교 등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편찬한 공식 국가 기록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란·화재 등에도 600년 넘게 보존·관리돼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선조들이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한 자세가 빛났는데요, 실록을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함께 지방 여러 외사고에 분산해서 보관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고가 불탄 상황에서 전주사고본이 유일하게 남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또다시 실록이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접근이 어려운 오대산·태백산·묘향산·마니산 등에 외사고를 마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선조들은 종이와 나무로 만든 기록조차 수백 년 지켜냈는데, 우리는 첨단 기술로 만든 디지털 기록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로 인해 정부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디지털 정부’ ‘IT 강국’이라는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배터리 1개에서 튄 불똥으로 인터넷우체국·정부24·국민비서·모바일 신분증 등 정부의 전산 시스템 674개가 먹통이 돼 추석 연휴를 앞둔 국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이런 불상사에 대비해 서버 이중화가 이뤄져 바로 재가동이 돼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디지털 외사고’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민족, IT 강국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인데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SK텔레콤·KT·롯데카드 등 주요 기업들이 연이어 해킹을 당하며 대규모 고객 정보가 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해커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우려까지 나옵니다. 국가의 전산망은 불타고 기업의 보안은 뚫리는 지금의 상황으로는 기록의 민족, IT 강국이라는 명성을 지킬 수 없으며, AI 시대를 선도하기는커녕 생존도 힘들 것입니다. 앞으로 더 복잡해지고 고도화될 디지털 시대에 대비해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25.10.12 06:00

2분 소요
의대 꺾이자 반도체 계약학과 ‘최상위 라인’ 부상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6학년도 주요 대학 수시 경쟁률이 나왔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이른바 '서연고' 자연계열 수시 평균 경쟁률은 15.36대 1을 기록했다. 고려대가 21.45대 1, 연세대가 16.29대 1, 서울대가 8.15대 1이었다. 지난해 2025학년도 평균 16.57대 1과 비교하면 하락세다. 전년도 기준으로 고려대 21.49대 1, 연세대 19.10대 1, 서울대 9.37대 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개 대학 자연계열 모두 경쟁률이 줄어든 셈이다. 대기업 계약학과, ‘의대 다음 라인’ 부상의약학계열 지원 열기도 다소 식었다. 전국 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 평균 경쟁률은 25.81대 1로 집계됐다. 의대는 평균 25.28대 1, 치대는 18.10대 1, 한의대 18.62대 1, 약대가 34.83대 1, 수의대 20.38대 1이었다. 지난해 2025학년도 의·치·한·수·약 평균 경쟁률 27.94대 1에 비해 하락했고, 지원자 수도 3만1,571명(21.9%) 줄었다.합격선과 지원자 선호도를 고려할 때, 의약학계열 다음 라인으로 꼽히는 곳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 계약학과인 셈이다.현재 계약학과를 운영하는 대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카카오엔터프라이즈, 삼성SDI 등 7곳이다. 이들 기업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포항공대, 경북대, 한양대, 서강대, 숭실대, 가천대 등 9개 일반대학과 계약학과를 두고 있으며, 카이스트 등 4개 과학기술원에서도 삼성전자와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계약학과별 경쟁률을 보면 기업별 희비가 엇갈린다. 삼성전자와 연계된 5개 대학의 2026학년도 수시 평균 경쟁률은 18.33대 1로, 전년도 21.16대 1에서 낮아졌다. 지원자 수도 4973명에서 4,492명으로 481명(9.7%) 줄었다. 반면 SK하이닉스와 연계된 3개 대학 평균 경쟁률은 30.98대 1로, 전년도 28.15대 1보다 상승했다. 지원자 수도 2,027명에서 2478명으로 451명(22.2%) 늘었다.삼성전자가 운영하는 대학별 계약학과 경쟁률은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가 31.22대 1로 가장 높았고, 성균관대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가 23.29대 1, 경북대 전자공학부 모바일공학전공이 17.85대 1, 고려대 차세대통신학과 14.10대 1,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12.38대 1,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11.01대 1 순이었다.SK하이닉스와 연계된 계약학과의 경우,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가 무려 48.50대 1로 가장 높았다. 이어 한양대 반도체공학과 36.59대 1,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12.04대 1 순이었다.만만치 않은 기업 연계 계약학과 경쟁률삼성전자 외 다른 기업과 연계된 계약학과도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현대자동차와 계약한 고려대 스마트모빌리티학부는 13.00대 1, LG디스플레이와 연세대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는 12.22대 1, LG유플러스와 숭실대 정보보호학과는 11.58대 1,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가천대 클라우드공학과는 37.57대 1이었다. 2026학년도에 신설된 삼성SDI-성균관대 배터리학과는 17.94대 1로 첫해부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기업별 평균 경쟁률을 보면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37.57대 1로 가장 높았으며, 전년도 34.48대 1에서 상승했다. 지원자 수도 65명(9.0%) 증가했다. 이어 SK하이닉스 30.98대 1, 삼성전자 18.33대 1, 삼성SDI 17.94대 1, 현대자동차 13.00대 1, LG디스플레이 12.22대 1, LG유플러스 11.58대 1 순으로 나타났다.과학기술원 내 계약학과도 열기가 이어졌다. 삼성전자와 연계한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반도체공학과는 경쟁률 9.89대 1로 전년도 9.12대 1에서 올랐다. 지원자 수도 39명(17.1%) 증가했다. 광주과학기술원 반도체공학과 역시 6.40대 1로 전년도 5.72대 1보다 상승했고, 지원자 수도 17명(11.9%) 늘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은 4.20대 1을 기록했으나, 전년도에는 학과별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아 비교는 어려웠다. 울산과학기술원은 지난해와 올해 모두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았다.다만 대기업 계약학과, 특히 반도체학과는 의약학계열과 중복합격이 잦은 전형으로 꼽힌다. 수시 6회 지원 제한 탓에 상당수 학생이 의·치·한·약 합격 후 계약학과를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중복합격 이탈 현상에도 불구하고 일반고 학생들의 합격선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반고 기준 합격선은 대체로 1등급 초·중반대에서 형성된다. 반면 과학고 출신들은 중복 이탈 규모에 따라 합격선 변동 폭이 크다. 일반고가 1등급 초·중반이라면, 과학고는 5등급 내외까지 합격선이 내려갈 수 있다.특히 남학생 최상위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약학계열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반도체 계약학과 지원으로 쏠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대기업 계약 반도체학과 합격생의 남학생 비율은 80%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향후 계약학과 선호도가 기업의 경영성과와 비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기업 상황이 직접적으로 학과 매력도에 반영될 수 있으며, 그 변동 폭은 매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2026학년도 경쟁률에서도 이미 기업들의 경영상황이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2025.10.11 10:00

4분 소요
애호가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와인 인문학]

유통

와인은 병에 담긴 역사이자 철학이다. 때로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그 욕망의 정점에는 신화처럼 군림하는 ‘컬트 와인’(Cult Wine)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유구한 역사에 도전장을 내민 신대륙의 담대한 꿈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완벽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충돌하는, 희소성의 미학과 탐욕의 경제학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와인 세계 판도 뒤흔든 컬트 와인이야기의 무대는 태양이 작열하는 언덕,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다. 1990년대 이곳에서 와인 세계의 판도를 뒤흔든 조용한 컬트 와인의 혁명이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할란 에스테이트’(Harlan Estate), ‘브라이언트 패밀리 빈야드’(Bryant Family Vineyards) 같은 이름이 있었다.이들은 유럽의 유서 깊은 와인들과는 다른 문법으로 새로운 신화를 썼다. 여기에 매 빈티지마다 이름과 예술적인 레이블을 바꾸는 ‘시네 콰 논’(Sine Qua Non)의 이단아적 행보와 영화 ‘오즈의 마법사’ 제작자의 포도밭에서 탄생한 ‘스케어크로우’(Scarecrow)의 낭만적인 스토리텔링이 더해지며 컬트 와인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다.컬트 와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컬트(Cult)란 특정한 인물이나 물건에 대한 광적인 숭배나 흠모를 뜻하는 라틴어 쿨투스(Cultus)에서 유래돼 문자 그대로 ‘숭배’(Cult)의 대상이 되는 와인을 지칭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연간 500케이스(약 6000병) 내외의 극소량만 생산돼 아무나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와인 애호가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존재다. 이 현상은 1990년대 미국 나파 밸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들의 성공 신화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첫째는 나파 밸리가 가진 최상의 떼루아를 바탕으로 완벽한 와인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의 집념이다.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에 최적화된 오크빌(Oakville)이나 프리처드 힐(Pritchard Hill) 같은 명당에 자리 잡은 이들은 포도나무 한 그루당 생산량을 극단적으로 줄여 포도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끌어낸다.여기에 빌 할란(Bill Harlan)처럼 ‘캘리포니아의 퍼스트 그로스’(First Growth)를 만들겠다는 장기 비전을 가진 설립자의 양조 철학 그리고 하이디 바렛(Heidi Barrett)과 같은 스타 와인메이커의 손길이 더해져 한 병의 와인은 비로소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결정적으로 로버트 파커와 제임스 서클링 같은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들의 100점 만점에 가까운 평가는 이들을 세상에 없는 존재로 각인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희소성을 극대화하는 그들만의 유통 방식은 컬트 와인의 신화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다. 이 와인들은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오직 생산자가 직접 관리하는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무한정 기다리는 자에게만 구매 자격이 주어진다. 스크리밍 이글이나 할란 에스테이트의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마치 비밀스러운 클럽의 회원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과 같다. 수년, 혹은 십수 년의 기다림 끝에 할당(Allocation)을 통보받는 순간의 희열은 와인의 맛을 보기도 전에 이미 최고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는 단순한 판매 전략을 넘어 소유욕을 자극하고 와인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심리적 장치다. 단순한 술 넘어 투자 자산으로자연스럽게 이 미국의 컬트 와인은 마시는 즐거움을 넘어 강력한 투자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경매 시장에서 이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최고가 기록이 경신된다.일례로 지난 2000년 나파 밸리의 한 자선 경매에서는 스크리밍 이글 더블 매그넘(6리터) 한 병이 50만달러(약 7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이제 이 와인들은 월스트리트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액체 자산’이 됐다.물론 이처럼 과도한 희소성 추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컬트 와인의 존재는 수많은 와인 생산자들에게 품질에 대한 영감을 주고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의 발전을 이끄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와인을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위화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가격 거품과 투기 심리를 조장한다고 지적받는다. 와인이 가진 본연의 가치, 즉 음식과 함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일상의 기쁨을 나누는 ‘소통의 미학’이 설자리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결국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한 병의 와인이 담고 있는 진정한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포도밭의 토양과 기후, 와인메이커의 땀과 철학이 응축된 액체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을 둘러싼 희소성의 아우라와 탐욕이 만들어낸 거대한 신기루일까.컬트 와인은 우리에게 와인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흥미롭고도 도발적인 존재다. 그 눈부신 신화 뒤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깊이 있는 인문학적 성찰일 것이다.

2025.10.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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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 압수수색'은 반드시 필요한가 [김기동의 이슈&로(LAW)]

전문가 칼럼

3대 특별검사의 수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사건인 만큼 철저한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이 규명돼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연일 보도되는 특검 관련 기사들 중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특검 피의자 또는 관련자)의 집을 압수수색했다”는 내용이다. 주거지 압수수색이 마치 수사의 필수 절차처럼 굳어진 현실을 보며 검사 시절의 경험이 떠올랐다. 필자는 25년 간 검사로 재직하면서 특수부, 강력부와 같은 소위 ‘직접수사 부서’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중요 사건은 거의 빠짐없이 피의자의 사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집을 압수수색을 하지 않으면 수사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것처럼 생각했다. 다시 생각하게 된 ‘자택 압수수색’검사로서 13년 차가 됐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런 수사 방식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생겼다. 당시 맡았던 사건 수사의 일환으로, 피의자 10여명의 사무실과 주거지 총 20곳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려고 결재를 올렸다. 평소 결재를 거의 반려하지 않고 검사들의 의견을 대부분 받아주던 차장검사가 이례적으로 압수수색영장 청구서를 반려하며 내게 물었다. “사무실은 몰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집까지 압수수색할 필요가 있나? 집에 범죄혐의와 관련된 자료가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나?.”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검사 생활 13년 동안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고통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핵심 피의자의 집만을 압수수색하고 나머지는 사무실만 압수수색했다. 주거지 일부가 압수수색 대상에서 빠졌지만 수사에 영향이 없었고, 수사도 잘 마무리됐다. 그 뒤로 필자는 특수부장, 수사단장 등 중요 수사 부서의 책임자를 거치면서 차장검사에게 배웠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 원칙에 입각하여 지시를 하면, 검사들은 과거의 내 모습처럼 불편해하고 당황했다. 특별수사의 원칙상 집까지 수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주거지는 사무실과 달리 가족공동체가 생활하는 사적 공간이다. 집에 수사관이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하게 되면 가족들이 받는 충격과 공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몇 년 전 지방에 있는 일선 지검장의 관사(아파트)가 다른 검찰청의 압수수색을 받은 적이 있다. 혐의사실은 다른 기관에 파견 나가 있을 때 그 기관의 업무 처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방 관사에 수년 전 타 기관의 업무 처리와 관련된 자료가 있을 리가 있었겠는가? 주거지는 반드시 압수수색해야 한다는 관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헌법 제12조 제3항에서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면서도 별도로 헌법 제16조에서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주거에 대한 압수나 수색을 할 때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거지 압수수색은 무엇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취지다. 검사가 직접 수사(1차 수사)를 내려놓고 한 발 떨어져 수사를 바라보면, 과도한 강제수사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압수수색·체포·구속과 같은 강제수사는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수사 활동이다. 강제수사에 대한 사법적 통제는 검사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 발부 전 심문제도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법관이전에 검사가 사법통제의 단계에서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수사의 밀행성 유지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검사가 사법경찰관의 설명을 듣고, 사건 관계인도 면담한 후 압수수색 영장청구 여부나 그 범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아울러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은 범죄혐의의 중대성, 증거 존재의 개연성에 대한 별도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검사들이여, 열정과 책임 다하라현재 국회와 정부에서 검찰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형사사건의 처리 지연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기화’야 말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다. 특히 기업은 장기간 수사를 받게 되면,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더라도 경영상 손해는 회복 불가능하다.검찰과 사법경찰 간에 사건을 주고받으면서 결론을 미루는 ‘핑퐁식’ 사건 처리가 다반사다. 검경 간에 기록이 넘어갈 때마다 사건 번호가 새로 부여되기 때문에 실제 사건 처리 기간의 파악 자체가 쉽지 않다. 간단한 고소사건임에도 실질적인 사건처리 기간이 2, 3년은 기본이고, 4, 5년이 넘는 사례도 빈번하다.앞으로 중대범죄수사청이 신설되면 사건 처리 지연 문제는 더욱 심화될 수 있다. 국세청 등 다른 국가기관은 조사 기간이 법률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수사 기간을 법률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예외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는 사법경찰은 검사의, 검사는 법관의 승인을 받아 연장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최소한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가 개시된 사건에 대하여는 수사기간 제한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속사건은 10일 내 검찰로 송치하도록 돼 있다. 이에 준하여 압수수색에 착수한 사건은 일정 기간(6개월)이 지나면 검찰로 송치하고, 검찰도 일정 기간(3개월) 내 종국결정을 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파격적인 방안이지만, 도입될 경우 국민의 인권 보장에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어려운 때일수록 검사와 검찰 구성원들은 국민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 사건 관계인들은 담당 검사가 사건을 철저히 검토해서 정확하게 처리해 줄 것이라고 학수고대한다. 사법경찰의 수사가 잘못됐거나 미진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수사기록만 형식적으로 검토해서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검사들이 열정과 책임감을 다한다면 그 이익은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국민은 검사들에게 신뢰를 되돌려줄 것이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 변호사

2025.09.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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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5일제 속도전? 한숨 커지는 기업들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정부가 주 4.5일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주 4.5일제를 도입해 2030년까지 노동시간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요, 최근 고용노동부가 이를 위한 3단계 로드맵을 만들고 법제처가 첫 단계로 ‘실노동시간 단축 추진 및 국가 지원 근거 마련’을 위한 ‘실노동시간 단축 지원법’(가칭)을 연내 의원입법 형식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법적 토대를 하나하나 만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주 4.5일제 추진은 주 5일제가 2011년 7월 5인 이상 사업장까지 전면 확대된 지 14년 만입니다. 주 5일제는 2002년 일부 정부 부처와 은행권에서 시범적으로 시작돼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확대된 끝에 모든 사업장에 정착됐습니다. 당시에도 금융계에서 앞장섰는데요, 이번에도 금융노조에서 주 4.5일제 전면 도입을 요구하며 총파업도 불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금융노조 측은 “주 4.5일제는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는 제도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보장하고, 여성 노동자의 경력 단절을 막을 수 있다”면서 “주 5일제처럼 금융권에서 먼저 도입한 뒤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 나가는 것이 속도와 순리에 맞다”고도 했습니다. 기업들은 정부와 노동계가 밀고 끌면서 주 4.5일제 도입이 빠르게 추진되고 있어 크게 우려하고 있는데요, 현재 낮은 노동생산성 상황에서는 시기상조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023년 기준으로 시간당 54.6달러로 OECD 평균(70.6달러)의 77.4%, G7 평균(80.6달러)의 67.8%에 불과할 정도로 낮은 상황에서 근무시간을 줄이면 인력 추가 채용이나 추가 업무 등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 기업 경쟁력이 악화한다는 것입니다. 중견·중소 기업은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장은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되면 소상공인 업종에서는 손님이 제일 많은 금요일 오후부터 연장수당이 붙게 된다”며 “일방적으로 소상공인이 부담해야 한다면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원이 11명인 소규모 제조업체 사장은 “주 4.5일제가 도입되면 금요일 오후에는 제품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무조건 도입 불가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데요, 생산성 향상과 경직된 노동 환경이 개선된다면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주 5일제도 전면 시행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전 사회적인 변화를 불러온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주 4.5일제도 마찬가지여서 추진해도 정부와 노동계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기업이 함께 사는 길 위에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2025.09.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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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곧 인구정책”...김창규 시장이 말하는 제천 재도약 전략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전문가 칼럼

충북 제천. 단순한 관광도시를 넘어 산업과 관광이 겹겹이 맞물린 도시로 재도약 중이다. 김창규 제천시장은 “제천의 해법은 경제”라고 단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현장을 누비며 체득한 확신이 묻어났다.“중앙아시아에는 55만명의 고려인이 있다. 성실하고 기술을 지닌 우리 민족이다. 저는 제천이 이분들을 맞이해 함께 살 길을 찾자고 생각했다.”김 시장은 과거 중앙아시아 외교관 시절, 고려인 사회와 맺은 인연을 정책으로 연결했다. 그는 고려인의 집단 이주 대신 개별 가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설계했다. 주거를 제공하지 않는 대신 일자리 매칭, 한국어 교육, 직업훈련으로 자립을 지원했다. 김 시장은 “이방인으로 격리시키면 실패한다”며 “제천의 산업단지와 서비스업 일자리를 스스로 고르고, 부부가 함께 일해 안정된 삶을 꾸리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그 결과 2년여 만에 323세대 826명이 제천으로 이주했고, 이 가운데 306명이 완전 정착했다. 초기 정착 가정이 남긴 긍정적 경험은 고려인 사회에 입소문을 타며 매달 수십 명씩 제천을 찾고 있다. 김 시장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청년 유출을 막으면서도 지역 인력난을 해결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평가한다.청년 창업과 귀농·귀촌, 경제로 키운 인구 전략김 시장의 인구정책은 단순 유입에 머물지 않는다. 세명대·대원대 창업보육센터를 거점으로 청년 창업을 지원하고, 체류형 창업지원센터와 청년 임대형 스마트팜을 통해 농촌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김 시장은 “지원금 몇십만원은 근본 대책이 아니다”라며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젊은 세대가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가 움직여야 인구가 움직인다. 일자리가 곧 인구 정책”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제천은 이미 3조5000억원의 투자 유치를 실현했고, 5조원을 목표로 일자리를 확대하고 있다. 귀농·귀촌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10개월 과정의 체류형 교육을 통해 매년 30여 세대가 지역에 뿌리를 내린다. 방문객이 오래 머물며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 진짜 성장이라는 김 시장의 말처첨, .제천은 관광 도시로서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관광객 1100만명을 돌파했으며, 1인당 관광 소비액은 20만원으로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다음 김 시장의 시선이 닿은 곳은 체류형 관광의 심장, 제천형 워케이션센터다. 2026년 완공 예정인 이 센터는 공유오피스와 숙박 17실을 갖춘 하이브리드 시설이다. 수도권 기업,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를 끌어들인다. 김 시장은 “센터는 창업의 요람이 될 것”이라며 “청년들이 외부 워케이션 참가자들과 교류하고, 투자 상담과 멘토링을 받으며 창업을 꿈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한방·웰니스 자원은 워케이션과 결합해 제천만의 장기 체류형 모델을 만든다. 참가자들은 근무 후 약초 스파와 한방 힐링 프로그램을 즐기며 ‘일과 치유’를 동시에 누린다. 김 시장은 “젊은 헬스디깅족부터 중·장년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며 확신을 보였다.스포츠 마케팅도 제천의 강점이다. 연간 120여 건의 전국대회와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유치해 1500억원 이상의 경제 효과를 거두며, 택시·숙박·음식업까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국제한방천연물산업엑스포, 산업화·세계화의 관문“천연물은 의약, 화장품, 식품의 핵심 소재다. AI가 생체 데이터를 축적·분석하면 연구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2025 제천국제한방천연물산업엑스포(9월 20일~10월 19일)는 제천의 미래를 여는 거대한 실험이다. 김 시장은 “엑스포는 단순 축제가 아니라 천연물 산업을 세계시장으로 확장하는 국제 행사”라고 강조했다.제천은 ‘천연물 소재 전주기 표준화 허브’ 사업을 유치하며 AI 기반 연구·개발·생체 실험 단축 등 첨단 기술을 접목했다. 엑스포에는 이미 340여개 국내외 기업이 참여를 확정했다. 해외 바이어 초청 수출 상담과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230억원 규모 수출 계약과 20억원 현장 판매를 목표로 한다. 생산유발 1207억원, 부가가치 647억원, 고용 2117명 등 직접 효과에 더해 관광, 숙박, 교통까지 합치면 2000억 원 이상의 지역경제 파급이 기대된다.김 시장은 “우리는 일회성 행사가 아닌 산업 생태계를 키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미 완공된 천연물 지식산업센터는 48개 기업 입주 공간과 연구·전시·커뮤니티 시설을 갖췄으며, 규제자유특구 지정도 추진 중이다. 그는 “천연물 산업만 제대로 안착해도 매출 1조 원 규모가 3~4조 원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제천은 이제 ‘산업화된 웰니스 도시’로 진화하고 있다. 고려인 유치에서 청년 창업과 귀농, 체류형 관광, 천연물 산업의 고부가가치화까지, 각각의 정책은 서로 맞물리며 인구 확장과 경제 자립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김창규 시장은 “AI와 디지털 경제가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할수록 지역의 생존은 자생적 성장에 달려 있다. 제천은 천연물 산업과 체류형 관광으로 그 해답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지방이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 제천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 성장의 모델이 되고 있다. 천연물 산업의 세계화와 관광의 깊이가 결합한 제천의 실험은 한국 지방의 미래를 묻는 이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2025.09.27 09:00

4분 소요
‘케데헌’이 증명한 ‘브랜드K’의 새로운 가능성과 과제[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서울 남산타워 입구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애니메이션 속 장면을 재현하며 사진을 찍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호작도 배지와 갓 키링 품절 대란으로 온라인 오픈런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KPOP Demon Hunters)가 만들어낸 경제적 파급효과의 생생한 현장이다. 실제 수치는 더욱 놀랍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케데헌’ 방영 이후 외국인 관광객의 37.7%가 K-콘텐츠를 접한 후 한국 여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응답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반기 관람객 수는 전년 동기대비 64.2%이상 증가했고 상당수는 케데헌이 공개된 지 1개월 이후의 관람객이다. 특히 외국인 관람객은 50% 이상 급증했다. K-푸드 관련 주식시장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대상, 오뚜기, CJ제일제당 등 K-푸드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연이어 상승했고, 김치찌개를 비롯한 한국 전통 음식에 대한 글로벌 검색량이 300% 이상 폭증했다.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던 '한류 피크론'에 대한 우려를 한방에 잠재웠다. 케데헌 현상은 한류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성장의 방식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브랜딩 관점에서 본 한류의 진화이제 우리는 한류를 단순한 문화 상품이 아닌 '문화 브랜드'로 접근해야 한다. 브랜딩 전략 측면에서 케데헌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면 '색다른 친숙함'이라는 핵심 개념이 도출된다. K-POP과 퇴마라는 이질적 소재의 조합, 서울의 현란한 야경과 한옥의 대비, 김치찌개와 현대적 K-POP 문화의 만남. 이 모든 것들이 글로벌 관객들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경험을 제공했다.이는 K-콘텐츠가 이제 단순히 '한국적인 것'을 넘어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한국적 감성'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을 최소화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은 유지하는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낸 것이다.팬덤 기반 확장 전략의 새로운 모델케데헌이 보여준 또 다른 브랜딩 차원의 중요한 시사점은 팬덤 기반 지식재산권(IP) 확장의 정석이다. 넷플릭스는 케데헌 세계관을 활용한 의류, 완구 사업은 물론 싱어롱 이벤트를 위한 극장 상영까지 추진하고 있다. 스트리밍 오리지널이 극장으로 간 이례적 사례다. 나아가 넷플릭스는 ‘넷플릭스하우스’ 라는 오프라인 체험공간을 올 연말 완공을 목표로 댈러스와 필라델피아에 개관한다. 이곳에서 세계적인 팬덤을 가진 ‘캐데헌’이 주요한 콘텐츠로 다뤄질 것이라는 건 물어볼 필요도 없다.이는 콘텐츠가 단순한 일회성 소비를 넘어 지속적인 가치 창출이 가능한 '살아있는 IP'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K-POP이라는 이미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장르와 결합함으로써 그 확장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확장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브랜드 K를 알리는 콘텐츠 자체의 성공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든 파급효과를 내재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K 브랜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IP 소유권이 만드는 차이: 해리포터 vs 쿵푸팬더케데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IP 소유 여부가 만드는 경제적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해리포터와 쿵푸팬더, 그리고 픽사의 코코를 비교해보자. 해리포터는 영국 작가 J.K. 롤링이 창조한 IP다. 책은 물론이고, 영화 시리즈만으로 전 세계에서 77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해리포터 테마파크, 상품, 뮤지컬, 게임 등으로 확장되면서 총 경제효과는 300조 이상이다. 핵심은 IP 소유자인 롤링과 영국이 이 모든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가져갔다는 점이다.반면 쿵푸팬더는 어떨까. 중국 문화를 소재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18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IP를 소유한 것은 드림웍스였고, 중국은 문화적 자부심 외에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중국 내 캐릭터 상품 판매 수익조차 대부분 미국 기업이 가져갔다. 픽사의 코코 역시 마찬가지다. 멕시코의 '디아 데 무에르토스(죽은 자들의 날)' 문화를 다룬 이 작품은 8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고, 멕시코 관광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IP에서 파생되는 핵심 수익은 여전히 디즈니의 몫이었다.케데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원재료를 제공했지만 가공과 유통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은 넷플릭스와 소니픽처스가 담당한 셈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K 브랜드가 지속가능할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케데헌’이 제시한 새로운 한류의 가능성을 토대로 K 브랜드의 미래를 다시 그려야 하는 이유다. 메이드 위드 코리아의 전략적 의미케데헌은 기존의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에서 '메이드 위드 코리아’(Made with Korea)로의 패러다임 전환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완성품 수출 방식에서 벗어나 기획, 제작, 유통의 가치사슬 전반에서 글로벌 파트너십을 구축하되, 핵심 지분과 권리는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초현지화(hyper-localization) 전략이 필요하다. 글로벌 이용자들의 문화적 장벽을 최소화하면서도 세밀한 디테일로 몰입도를 높이는 것이다.케데헌의 성공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국계 제작진과 실제 K-POP 업계 관계자들의 참여로 현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한국 문화의 면면들을 그려냈고, 제삼자 시선으로 포착한 디테일은 한국인들에게도 신선함을 주었다.넥스트 K로 가는 길케데헌은 K-콘텐츠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 이정표다. 우리 문화의 글로벌 파워를 재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 파워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들도 명확히 제시했다.이제 우리는 문화적 자부심을 넘어 산업적 주도권 확보로 나아가야 한다. 케데헌이 증명한 K-콘텐츠의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음번에는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고 유통까지 주도하는 '넥스트 K'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케데헌의 성공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돼야하는 이유다.

2025.09.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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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성공하는 조직의 조건...AI를 운영체제로 전환해라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얼마 전 ‘미래의 조직, 조직의 미래’라는 책이 출판되었을 때만 해도 ‘인공지능(AI)이 조직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때가 얼마나 빨리 올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즈니스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AI가 미치는 영향을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AI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 전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이를 조직 운영에 적용하는 기업들의 준비 수준은 극명하게 갈린다. 이미 앞서가는 기업들은 AI를 기존 시스템과 프로세스에 빠르게 통합하여 효율성과 성과 측면에서 혁신을 이뤄내고 있다. 반면, 어떤 기업들은 여전히 AI 도입 자체를 고민하거나, 단순히 개인 단위의 효율화 도구로 활용하는 데 그치고 있다.글로벌 컨설팅 회사들도 AI가 바꿀 산업과 노동의 미래에 관해 앞다투어 보고서를 내고 있다. PWC의 「2025 글로벌 AI 직업 바로미터」 보고서는 AI에 많이 노출된 직종(금융 분석가, 고객 지원 담당 등)은 그렇지 않은 직종보다 직원당 수익 성장률이 3배 이상 높았으며, 이들 직무에 요구되는 핵심 역량의 변화 속도 또한 66% 더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이는 AI가 업무 효율을 높여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과 조직의 지속적인 학습과 혁신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단순한 '도입'을 넘어 '조직 재설계'로 현장 리더들과의 인터뷰나 주요 기업 사례 연구를 통해 성공하는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AI를 단순한 기술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중심으로 마인드셋, 조직 문화, 업무 흐름 등 조직의 운영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고 있었다.산업 전반의 경쟁 구도는 이미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AI를 기반으로 사업을 구상하는 'AI 네이티브' 기업이 등장하는가 하면, AI를 ‘조직의 일원’으로 개념화하여 인간과 AI가 함께 의사결정하고 협업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확대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코파일럿(Copilot)을, 구글은 제미나이(Gemini)를 업무 흐름에 녹여 협업 방식을 바꾸고 있으며, 세일즈포스는 '디지털 노동력(Digital Labor)'을 통해 24/7 고객 서비스를 구현한다. 이는 과거 글로벌 기업이 전 세계에 물리적인 공유 서비스 센터(SSC)를 두었던 것에서 한 차원 진일보한 방식으로, 기술 도입과 동시에 조직 운영 모델을 혁신한 사례다.AI 시대의 조직 변화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의사결정까지 AI에게 맡길 것인가 ▲인간의 역할은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이러한 혁신을 위해 필요한 정책·시스템·조직 문화·역량·리더십은 무엇인가다. 이 질문들을 바탕으로, AI 전환에 앞서가는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준비하는 5가지 핵심 영역을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정책·제도·시스템 같은 하드(Hard) 요소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처럼 소프트(Soft)한 요소들까지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AI 시대를 선도하는 조직의 5가지 핵심 준비 영역 AI 전환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기업들에는 공통적으로 5가지 핵심 영역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의사결정 파트너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AI의 협업 거버넌스 인간과 AI의 하이브리드 의사결정 체계는 둘 사이의 협력 가치를 내재화하기 위한 거버넌스를 포함한다. 알고리즘적 사고의 한계를 인지하고, 결과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최종 의사결정 권한을 명확히 인간이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즉, 인간이 해야만 하는 영역과 AI가 뛰어난 영역의 경계를 이해하고, 절차와 범위를 명확히 설정해야 실수나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2024년 에어캐나다의 챗봇은 고객에게 잘못된 할인 정보를 안내해 법적 분쟁을 야기했고, 법원은 항공사의 책임을 인정했다. 반면, 대출 플랫폼 업스타트(Upstart)는 전통적 신용평가 방식이 놓쳤던 교육 수준·고용 이력·소비 패턴 등을 AI 모델로 분석하여 대출 부실률을 크게 낮췄다. 핵심은 ▲AI에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고 ▲AI가 제시하는 통찰을 사업적 맥락에서 해석하며 ▲최종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선도 기업들은 향후 다중 AI 에이전트 활용으로 더욱 복잡해지는 협업 환경에서는 예측불가능한 상호작용 발생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IBM 등은 AI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별도의 전문 부서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논의에 참여시키고 있다. 수평적이고 민첩한 조직이 있다는 게 또 다른 공통점이다. 경계를 허무는 협업 전통적인 위계 중심 조직 구조와 달리, AI는 부서 간 경계를 허물고 데이터 연계성을 높여 아이디어와 정보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기능 간 협업은 전에 없던 형태로 확장되고, 새로운 조합을 통해 혁신적인 해결책을 만들 수 있다.AI가 중심이 되는 조직은 기능별 고정적인 구조를 최소화하고, 목적 중심으로 유연하고 민첩하게 변형 가능한 구조를 확대한다. 조직 개편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AI 기반의 조직은 문제해결을 위한 최적의 자원 배분과 민첩한 실행을 위한 수평적 관계 구조로 운영하는 것이 효과적이다.테슬라는 매우 평면적인 조직구조를 운영한다. 중간 계층을 최소화하고 엔지니어들이 직접 일론 머스크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유지한다. 이를 통해 신속한 의사결정과 혁신이 가능하다. 애자일 방법론은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하드웨어 제조 분야에도 적용되어 자율적인 팀들이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협력하여 신속히 솔루션을 모색하도록 한다.스포티파이의 Squad 모델도 소규모 자율팀을 작은 스타트업처럼 운영하여 스스로 업무 방식을 선택하고, 네트워크 조직으로 지식공유를 활성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도록 운영한다 수평 구조 운영의 핵심은 심리적 안전감 (Psychological Safety)으로, 구성원들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환경적 요소이다. 여기에 AI 협업 툴을 더하면, 시공간 제약 없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다. 이는 원격, 하이브리드 근무환경을 선호하는 현 세대의 특성에도 부합한다. 세 번째 미래형 인재 생태계가 존재한다. 성과를 낼 수 있는 인재의 요건이 무엇인지는 모든 기업의 경영자가 밝히고자 하는 내용이다. AI와 함께 일하는 조직에서는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역량과 성과책임이 더욱 선명해져야 한다.글로벌 인재관리 컨설팅사인 콘 페리(Korn Ferry)의 채용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기업은 핵심기술을 가진 인재의 채용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범용 자격요건 (예: 학위, 자격증, 특정 회사나 직무 경험 등)의 중요도는 이전 보다 더욱 감소하고, 핫스킬 보유자를 확보하는데 집중된다. 특히 AI관련 스킬을 보유한 직원들은 평균적으로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업은 인재를 확보하고 성장시키는 기준이 되는 스킬맵을 정의하고, AI를 활용하여 스킬 보유, 이동 경로, 활용 현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며 최적의 스킬 조합을 찾아야내야 한다. 인재관리는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몇 년간 지속적 감원으로 인적자원 최적화를 진행하는 메타·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의 기업들은 엄격한 성과관리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최적화의 또 한 축으로는 기존 인재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리스킬, 업스킬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운영한다. 이러한 조직중심의 프로그램 운영과는 별개로 어느 때보다도 신기술과 역량에 대한 구성원의 자발적인 학습 노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재 요건 중 뚜렷한 경력 비전과 일에 대한 소명 의식, 자발성과 성장 마인드셋, 적응 능력 등이 중요한 자질로 고려될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관리자 역할에도 영향을 미친다. 디지털 역량 격차를 빠르게 줄이고, AI 활용 업무를 판단하고 조언하며, 디지털 워크 포스를 포함한 자원 관리, 동기부여 등의 고도의 휴먼 스킬이 리더들에게 새롭게 필요한 역량으로 강조된다. 빠른 실패를 하고 더 빠르게 학습한다는 공통점도 눈에 띈다. AI 시대는 빠른 실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완벽한 계획하는 것 보다 신속한 실행과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이 더 중요하다. 문샷 팩토리로 불리는 구글의 연구조직 X는 체계적인 실험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조직은 실패로 인해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 직원들을 축하하고 보상한다. 프로젝트 종료가 실패가 아니라 실험의 성공적인 신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단된 프로젝트의 인사이트, 경험, 프로토타입 등은 다음 아이디어에 영감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우리는 세계 최고의 실패 장소입니다. 실패와 발명은 분리할 수 없는 쌍둥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와 유사한 문화적, 제도적 사례들은 기존 기업들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현재 성공적으로 AI를 도입한 기업들이 선명한 철학하에 조직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혁신 시대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핵심은 AI와 협업하여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속도가 빨라진 만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행-피드백-개선의 업무 방식을 조직에 생착시켜 AI와 함께 일하는 이점을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다. 실패 예산 제도 등으로 건강한 실험 환경을 만들고, 학습 성과를 인정하며 실패 경험을 자산화하고 확산시키는 체계 마련과 한께, 성과 목표와 허용 범위를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윤리에 기반한 신뢰가 존재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AI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새로운 리스크가 등장한다. 데이터 오남용이나 보안 침해, 알고리즘 편향, 정보 유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현세대에게는 AI와 관련 윤리와 투명성이 장기적인 신뢰 형성과 경쟁력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기업은 내 외부 고객 모두에게 일관성있는 AI 윤리기준을 적용하고, 이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원칙과 체계를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 오픈 AI 출신 연구진들이 창업한 Anthropic은 인류를 위한 AI라는 방향성 하에서 AI의 안전성과 윤리적인 배포를 위한 프레임워크를 구축했다. 윤리원칙과 제약조건들을 내재하여 AI가 인간을 잘못된 결정으로 유도하는 등의 파괴적인 행동을 사전 테스트한다. 또한 AI에게 명시적인 헌법을 제공하여 윤리적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훈련시킨다. 기업용 서비스는 전문 영역을 고위험 영역으로 구분하고, 전문가의 검토를 의무화하는 등의 엄격한 제한 규칙을 따르며 더 높은 고객 신뢰를 얻고 있다. 핵심은 Responsible AI를 위한 노력이다. AI의 활용이 증가함과 동시에 리더십은 의사결정시 AI 사용에 대한 책임감을 조직에 내재화해야 한다.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작성하여 공유하고, 정기 감사 등의 모니터링과 점검체계를 운영하며, 구성원들을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고객에게는 의사결정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체계와 피해 발생 시 대응할 수 있는 절차 등의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AI가 로봇 등 다른 기술들과 융합되는 미래를 대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확장된 활용 영역과 다양한 협업 관계에 대한 고려, 사회적 책임 의식 등을 경영 원칙에 포함하고 공유할 수 있다. AI 혁신,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기업의 상황과 준비도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 선도기업 수준의 조직운영 환경을 갖추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 수준을 빠르게 진단하고, 우리 기업 상황에 맞는 우선순위를 정해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서두의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 본다. 첫 번째, 어떤 의사결정을 AI에게 맡길 것인가. 두 번째, 사람의 역할은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세 번째, 이러한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데 필요한 ▲우리 조직의 정책 ▲시스템 ▲문화와 역량 ▲리더십은 무엇인가. 우리의 현재 수준은 어떠한지를 살펴봐야 한다. AI는 조직 운영의 체질을 바꾸고, 경쟁우위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성공을 위해 조직의 사고방식과 운영방식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작은 것부터 실행해 나가야 할 때다. 필자는 IBM, 헤이그룹, 삼성글로벌리서치, 하이브 등에서 20여 년간 조직과 인사 분야 전문성을 쌓아왔다. 현재는 디아이(THEI) 대표로서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조직 환경에서 구성원과 회사 간 신뢰 형성, 효과적인 동기부여, 그리고 협업 체계 구축 등 핵심 조직 이슈 해결을 위해 다양한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다.

2025.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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